출처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worldbaseball&ctg=issue&issue_id=537&mod=main


4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전에서 끝내기 안타를 친 후 동료들로부터 격한 세리머니를 받고 있는 추신수

어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홈경기에서 터진 끝내기 안타로 인해 많은 분들한테서 축하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끝내기 안타 세리머니 후 제 표정이 밝지 않았었나요? 웃어도 환하게 웃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끝내기 안타의 짜릿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하지만, 어제 경기 내내 잘 풀리지 않는 답답함에 속을 끓였던 터라 막상 11회 말에 가서야 터진 끝내기 안타가 온전한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승부를 결정지을 만한 좋은 기회도 있었고, 연장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잘 친 타구가 번번이 잡히는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제 스스로 화가 많이 났던 것 같습니다. ‘야구’가 사람이라면 한 대 쥐어박았을 지도 모를 만큼 진짜 얄미웠거든요.

솔직히 어제의 끝내기 안타보다 그 전날 우리 팀의 호머 베일리가 보여준 노히트 노런 경기는 제가 그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우리 팀 선수의 노히트 노런 경기를 지켜본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거든요. 그런 팀의 동료 선수로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고, 호머 베일리의 호투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진심으로 축하를 전했습니다.

호머 베일리의 노히트노런을 축하하기 위해 음료수통을 들고 나와 뿌린 선수들

호머 베일리의 노히트 노런 현장에서는 깜짝쇼가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제 아들 무빈이가 덕아웃에 있다가 경기가 종료되는 동시에 호머 베일리를 향해 뛰어 나가서는 손바닥을 부딪치며 축하를 보냈습니다. 사실 무빈이는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가면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선수들의 격한 세리머니가 펼쳐지는 가운데 자칫 잘못하면 부상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빈이가 그걸 모르고 있었고, 선수들이 모두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그라운드로 향하자, 무빈이도 따라 나갔다가 호머 베일리와 기쁨을 나누게 된 것이죠.

무엇보다 무빈이의 돌출행동을 환한 미소로 받아준 호머 베일리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무빈이한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을 테니까요. 그 경기 이후로 무빈이는 야구선수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확신했다고 합니다. 이전까지 100%였다면 호머 베일리 경기 이후로 1000% 확신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날 경기가 ESPN-TV를 통해 하이라이트 형식으로 방송됐는데, 게임 뛴 아빠는 얼굴도 안 보이고, 세리머니를 위해 뛰어 나간 아들 녀석만 더 자주 반복해서 방송으로 나오더라고요. 은근 기분 좋던데요?

제가 시즌 초부터 줄곧 1번 타순에 서다가 최근 좌완투수가 선발로 나설 경우 2번으로 조정된 적이 있습니다. 베이커 감독님의 배려이지만, 전 1번이든, 2번이든 상관이 없고, 상대 투수도 제가 어떤 타순에 서더라도 마치 3번타자를 상대하는 것마냥 변화구 위주로 피칭을 하기 때문에 타순 조정의 효과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브론슨 아로요와 추무빈 군. 덕아웃에 앉아 과자를 먹는 무빈 군에게 아로요가 장난으로 과자를 달라고 하자, 경계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이 재미있다.

제가 1번타자로 나서면 투수들은 1회부터 변화구를 던집니다. 1회 초, 원 볼, 투 볼은 물론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상황에서도 직구를 못 본 지가 오래됐어요. 덕분에 볼넷이 많아요(7월 5일 현재 59개). 투수가 변화구 위주로 피칭을 하기 때문에 제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볼넷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죠. 선두타자는 안타든 볼넷이든 출루를 해야 합니다. 남다른 선구안으로 나쁜 공에 손을 대지 않는 것도 선두타자의 조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제 경기 전에 신시내티 구단에서 마련한 장애인 유소년 클리닉에 다녀왔습니다. 몸이 불편한 아이들과 야구 놀이를 한 셈인데요, 다리와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 글러브를 잡고 공을 던지고 타격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파고가 밀려왔습니다. 멀쩡한 몸 상태로 야구하면서 아프고 힘들고 피곤하다며 불평 불만을 털어놓았던 제 자신부터 반성했습니다. 몸이 불편한 아이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보면서 제가 처음 야구를 시작하면서 가졌던 그 ‘초심’을 떠올렸습니다. 그 아이들은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보면서 환호를 보냈겠지만, 저 뿐만 아니라 함께 참여했던 선수들도 클리닉을 마치면서 마음 속에 하나의 느낌표들을 안고 가지 않았을까 싶네요. 

사는 게 뭐 별 거 있겠습니까. 무덥고 습한 여름에 시원한 수박 한 조각에도 감사함을 느끼고, 가족의 건강과 무탈에 행복을 느끼는 게 우리들의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우천으로 경기가 취소된 걸 안타 행진의 리듬이 깨졌다며 아쉬워하기 보다는 휴식을 통해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면 스트레스 쌓일 게 없는 것이죠. 오늘 새삼 깨닫습니다. 행복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는 사실을요.

* 이 일기는 추신수 선수의 구술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유소년 장애인 야구 클리닉 행사에서 추신수를 만난 아이들. 해맑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아이들 표정이 인상적이다.


Posted by 코딩하는 야구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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